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요토미 히데요시/생애 (문단 편집) === 엇갈린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 ===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본인 특유의 [[허세]]와 [[블러핑]]이 섞인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블러핑이 섞였다곤 해도 히데요시가 제시한 요구 조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명과 조선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송응창]]이 내세웠던 명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1.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1.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 참고로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훗날 조·일 국교가 회복되면서 이 전쟁에 불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것도 내막을 보면 이에야스가 마냥 평화주의적인 성격이라 사과했다고 보기도 뭐한 게,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저지른 전쟁을 왜 조선 간 적도 없는 나한테'라는 반응이었고, 결국 두 나라 사이에 낀 [[대마도]]주가 두 나라의 국서를 위조함으로써 조선에게는 '일본이 사죄했다'는, 일본에게는 '조선이 일본의 국교 회복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두 나라는 대마도주의 농간을 알면서도 현실적 필요 때문에 속아준 것이라는 게 현 학계의 정설. 대마도주의 행각은 명백히 국제적 사기나 다름없지만 빨랑 조·일 관계가 회복돼야 대마도도 먹고 살 길이 트이는 것이 현실이고 조선은 중국 쪽에서 명나라가 쇠하고 여진족이 흥기하는 과정을 밟고 있어서 더 이상 일본과 으르렁거릴 수만은 없었고 일본도 어쨌거나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으니 모두가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한쪽은 속이고 두 쪽은 알면서도 속아줄 수밖에 없던 것.] 그러나 일본의 요구조건들은 조선과 명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1.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1.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1.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1.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1.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한다. 1.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 조항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명나라 황녀 문제: [[화번공주]]라 하여 역대 [[중국]] 왕조에서 황녀를 외국의 지배자와 공식 혼인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든 선례는 분명 많았다. 따라서 만약 히데요시가 천황의 정비 혹은 실권자인 본인의 정실 부인으로 황녀를 맞이하겠다고 주장했다면 명나라로선 조금이나마 고려할 가치가 있었다.[* 또한 화번공주도 진짜 공주만 보내는 게 아니고 대충 종실의 여자를 심하면 그냥 궁녀 하나를 적당하게 공주처럼 꾸며서 보내기도 했다. 그랬기에 정 공주를 보내기 싫다면 이런 방법이라도 쓸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에도 [[이방원|태종]]이 [[명나라]]의 황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명나라 사신에 의향을 전했고, 명나라 사신 또한 '경사스러운 일'이라며 기뻐했지만, 양국 간의 내부 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태종도 이후에는 명나라의 황녀를 며느리로 맞는 것이 안 좋다 여겼는지 얼른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는다. 그리고 그때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행실의 문제로 폐세자 되었고 당연히 세자빈도 지위가 박탈당한다(이혼을 한 건 아니다). 이후 새로운 세자가 된 충녕대군의 사돈이던 심온이 태종의 외척 견제책의 일환으로 숙청된 걸 생각하면 양녕이 폐세자된 게 김한로에겐 전화위복이 되긴 했지만.] 하지만 정식 [[황후]]도 아니고 겨우 [[후궁]]으로 취급하겠다는 건, 명나라 입장에서 [[오랑캐]]에게 황녀를 [[첩]]으로 내준다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어처구니 없이 무례한 요구였다. 설령 대등한 관계였다고 해도 후궁으로 황녀를 내준다는 건 패전을 인정하라는 수준의 국가 모독이다. 사실 이 부분만으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상식이 부족한 인물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 무역 증서제 부활 및 각서 교환: 그나마 [[명나라]] 측에서 수용할 수 있는 부분. 무역 증서제란 감합 무역이라 부르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행했던 일로 이 배는 일본에서 명나라랑 무역하기 위해 온 배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명나라에서 작성해 반쪽은 일본에 주고 반쪽은 명나라가 갖고 있다가 배가 오면 증서를 맞춰 맞으면 일본에서 온 배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전국 시대에 다이묘들이 너나없이 명나라랑 교역하려고 하자 폐지되었다. 즉 이 두 조항은 일본과 명나라의 공식 관계 수립 및 교역의 정상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명나라 측에선 그나마 타협이 가능한 부분이다.[* 실제로도 에도 막부가 열린 뒤 중국은 일본과 다시 무역을 재개하게 된다.] 1. 조선 4도의 할양: '''항목 중에 특히 조선에게 제일 무리한 조건'''.[* 애초에 선조 본인부터가 적에게 항복 혹은 휴전을 하자고 간언하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고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다만 명나라 사신과 황제가 그래도 협상은 해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은 것뿐이다.] 명나라가 강화 협상 당시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 즉 일본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조선에서 철수하면 다른 조치 없이 넘어가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유정(명나라)|유정]] 등의 사례들처럼 명나라군이 일본군에게 뇌물을 받고 명나라군이 일본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어 명나라군이 일본군을 통과시켜 주는 등 명나라군과 일본군이 서로 내통한 사례들이 여러 건 있긴 하나 이러한 사례들조차도 이미 일본군이 조선에서 조용히 나간다고 해서 명나라군이 일본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어 명나라군이 일본군을 통과시켜 준 것이지, 명나라가 조선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다. 설령 명나라가 이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극히 일부도 아닌 절반을 빼앗길 판에 '''조선이 들어줄 리 만무하다'''. 히데요시가 주장한 4도 할양은 사실상 [[일본군]]이 그 시점에서 점령한 [[경상도]]를 비롯한 조선 남부 지역 4도([[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 [[경기도]]or[[강원도]])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쓸모없는 황무지로만 가득 찬 변방 지역이라고 해도 조선 측에서 수용할 리가 없는데, 이 지역은 조선에서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가장 많은 핵심 지역이다. 이런 걸 내놓으라는 건 보통 승전국이 패전국한테 '나라는 보존케 해 줄 테니 살을 다 내놔라'는 의미로 내놓는 조건이며, 사실상 패전국의 저항 역량이 완전히 소멸됐을 때나 수락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의 임진왜란은 일본이 패전은 아니었어도 승전 분위기와도 한참 멀었으니 히데요시가 전황을 제대로 읽고는 있었는지도 의심되는 대목. 명나라에서조차 이건 받아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고, 명군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피해도 큰데 그냥 조선이 알아서 하라고 하자 vs 우리가 영토를 다 찾아주고 난 뒤에 철군하자'는 쪽으로 일찍 후퇴하냐 아니면 같이 싸워 이긴 뒤에 후퇴하냐가 요점이었지, '영토를 넘기느냐 마느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히데요시로선 대륙 정벌의 망상에서 최소한 조선 절반이라도 건지려고 내건 조건이었겠으나 국가 간의 협상에서 씨도 안 먹힐 만한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먹힐 턱이 없는 것이었고, 이 정도로 국제적 현실성이 결여되고 자기 혼자만의 욕심에 사로잡힌 요구는 '''들어줘도 문제다.''' 그리고 사실 저 하4도의 곡창 중핵인 전라도는 [[이순신|일본이 가장 점령하기 어려워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조선의 4도를 일본이 먹었다 치자. '''[[의병|맨날 일어나는 반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문명국임을 자처했던 조선인들이 야만인이라 멸시했던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리 절대 없었을 것이며, 당시 일본은 [[센코쿠 시대]]라서 자국의 통일조차도 엉성한 봉건 할거 상황이었고 조선왕조를 멸망시키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조선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우르트메르의 [[십자군]]처럼 바다 건너 수백만의 적대적인 피지배민 속에서 고립된 영지로 [[임나일본부]] 실사판이나 찍다가 히데요시 사후, 잘해봤자 얼마 못 가 조선 점령지에서 쫓겨났을 것이 뻔하다. 설령 만에 하나 정말로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결국은 조선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도요토미가 있는 본국에 반기를 일으킬 것이 뻔했다. 어차피 바다 건너에 있는 도요토미의 명령이 조선땅에 와 있는 다이묘한테 먹힐 리도 없을 테니. 1. 왕자의 석방 및 볼모 송환: [[임진왜란]] 이전의 한국사에서 일반 신하도 아니고 왕자를 다른 나라에 볼모로 보낸 것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실성 마립간]]이 복호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과, [[고려]] 때 [[여몽전쟁]] 및 이후의 [[원 간섭기]] 시절 왕자를 보낸 사례 정도가 있다. 그나마 전자는 인질을 빌미로 선왕의 아들들을 숙청하려는 의도였고, 후자는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고 살기 위해 보낸 것이다. 즉, 조선이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조선 측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1.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 이는 2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권신'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해석해야 하는데 히데요시는 [[선조(조선)|선조]]도 군주가 아니라 자신처럼 '[[천황]]'의 아래에서 실권을 가진 신하라고 여겼다. 이는 선조를 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국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오히려 히데요시의 경우 공식 직함인 관백 & 태정대신은 조선으로 치면 [[영의정]]~좌의정, 높게 쳐봐야 군 정도의 지위이다. 조선의 입장에선 고작 왕 아래 일개 신하 주제에 상대국 국왕을 있지도 않는 존재의 신하 취급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충분히 모욕이었다.] 또한 조선을 침공한 책임은 엄연히 일본에 있었는데, 이 책임은 전혀 대가를 치르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게 신의를 강요하는 주장은 조선 입장에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조건들을 외교를 전담하던 오선승(五禪僧, 외교 담당 [[승려]])을 통해 강화사로 위장한 [[송응창]] 부하인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물었으나 당연하게도 '이대로 전할 수 없고, 특히 명나라 황녀를 보내라는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무엇으로 증거를 삼을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순의왕(順義王, [[알탄 칸]])의 예가[* 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북로남왜 중 북로인 몽골족의 족장([[칸]])이었다. 명나라와 화의를 맺는 과정에서 황녀를 시집 보내지 않았다.] 있다. 증거는 필요 없으니 조건을 삭제해달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공주]]와 [[천황]]의 결혼, [[조선]] [[왕자]]의 인질이라는 조건이 아니면 4개 도를 반환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하며, ''''일본과 명나라의 관계가 끊긴 지 오래이기에 조선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조선이 시간만 끌고 속이기에 징벌하게 되었다. 이제 명나라 사절이 왔으니 사절이 우리의 요구 조건을 잘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사용재와 서일관은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을 그대로 보고하는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임명하여 무역을 부활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고 허위 보고한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강화 조건으로 히데요시의 항표문을 요구했고 강화사 파견에 대한 답례사 겸 가짜 항표문을 가지고 있었던 유키나가의 심복 나이토 죠안(內藤如安, 코니시 죠안)이 [[만력제]]를 배알하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책봉할 무장의 명단도 함께 제출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 파악한 다이묘의 서열대로 초기 명단이 작성되지만 일본 측이 정정을 요청하여 수정 후 제출되었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이전의 조건과 더불어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석성은 일본에게 다음의 3가지를 요구한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임명은 하지만 무역은 요구하지 말 것. >3. (일본이) 명나라의 번속국이 됐으므로 (같은 번속국인) 조선과 화해하고 침략하지 말 것. 이후 명나라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지만 일본군의 완전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였고, 고니시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새로운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을 살펴보면 히데요시는 이미 자신이 일본 국왕에 책봉됨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서를 지참하는 것, 무역을 하게 될 경우 금인으로 증거를 삼고자 하였다.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 [[다이묘]]로 삼는다고 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나머지 4개 도만 갖겠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 소 중 10개 소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나라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나라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으로 돌아와 [[부산]] 지역에 있던 일본군의 군영 2/3를 불태웠지만 여전히 책봉 정사 이종성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하였고, 책봉사의 일정이 지체되는 것을 다시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이 때 정사 이종성이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고 더이상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진 책봉사절은 책봉 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에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일본으로 출발한다. 조선 측에서는 황신을 정사로 삼아 사절단을 보낸다.[* 이 일을 기록한 책이 '일본왕환일기'이다. 히데요시가 조선 사절단의 접견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절들은 명나라 관리들에게 책봉장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다.] 심유경은 정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히데요시를 만나는데, 심유경의 행렬에는 구경꾼들에게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알리는 팻말이 있었다고 [[루이스 프로이스|프로이스]]가 기록하고 있다. 이후 책봉식에서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일본국왕]]에 책봉되었다.[* 명나라에서 순의왕의 예를 따라 '순화왕(順化王)'으로 왕호를 정하려 했으나 전통적으로 일본의 지배자에게 책봉하던 '일본 국왕'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다이묘들 또한 각기 서열에 따른 명나라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때 책봉문, 금인, 관면을 수령했는데 현재까지 남아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장면을 기록한 대표적인 1차 사료들이 일본의 승려 겐소의 선재고, 유럽의 선교사 프로이스의 기록, 조선 사절의 정사 황신의 [[일본왕환일기]], [[조선왕조실록]]이다. 다이묘들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었다고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왕환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한 기록들에서는 히데요시도 명나라의 관복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일본 측의 기록인 선재고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인을 받고 명나라 옷을 입고 만세삼창을 했다'''고 씌어있다.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모두 일본 의식으로 히데요시와 책사는 다다미에 앉아서 양자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하였다. 출석자는 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筑前([[마에다 토시이에]]), 越後([[우에스기 카게카츠]]), 中納([[우키타 히데이에]]), 金吾殿([[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毛利([[모리 데루모토]])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 국토에서 최대의 국주들이었다. 주연 후에 관백은 영예있는 서책, 즉 커다란 황금 서판인 금인을 수리하고, 이것을 머리로 추대하고, 이때 관면(冠冕)도 수령했기 때문에 이것을 착용하기 해서 별실로 갔다'''고 기록되었다. 조선 측 기록은 2가지이다. 조선 사신단의 정사인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서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았고 다이묘 40명도 관대를 착용하고 수직(授職)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자세한 내용을 묻자 '''봉작례가 행해졌으며, 관백이 뜰에 서서 오배삼고두의 예를 행하고 경건한 태도로 내려주는 의복을 받았으며, 그의 신하 40여명이 모두 차등 있게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다'''고 앞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말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덕수의 보고에는 책봉장에 있었던 왕귀가 이야기한 것을 황신과 같이 들었다고 하는데 황신과 다르게 '봉왕(封王)할 때에 적장(賊將) 40여 인은 다 당복(唐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나, 관백만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아마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던 듯싶다.]라고 보고한다. 그러나 우준민이 '역관(譯官)·군관(軍官) 등이 다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어떤지 모릅니다'라고 첨언하는 등 실제 보지 못했던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KBS 팩션 사극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이등체강된 조선 왕과 똑같이 친왕의 붉은 [[곤룡포]]와 [[익선관]]을 착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른 논문에서는 [[이등체강]]되어 친왕 대우인 조선 왕과 다르게 삼등체강된 군왕의 대우로 책봉하고 관인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히데요시가 책봉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어쨌든 1596년 9월2일,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히데요시는 신종 황제([[만력제]])의 칙서에 '''‘5번 절하고 3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五拜三叩頭禮)를 행하고 [[만세]]까지 불렀다.'''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공순한 태도를 취한 셈이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곧 ‘현실’을 깨닫는다. 히데요시가 실제로 자신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요구 조건들인 '명나라의 황녀와의 결혼, 조선 4도의 획득, 조선왕자 인질' 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고, 협상을 잘 이끌기 위한 전국 다이묘 특유의 야쿠자식 블러핑 조항이었을 것이며, 결국 히데요시가 원한 최소한의 요구 조건은 '''조선왕조처럼 중국을 상대로 매년 조공 무역을 허가받는 것''' 정도였을 것이나, 정작 그 최저한의 요구 조건조차 이뤄지지 않았고, 조선 국왕과 같은 제후국왕처럼 온갖 굴욕적인 예식은 시키는 대로 다 했음에도 조선 왕과 달리 히데요시는 달랑 '책봉 칙서 1장'밖에는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격노한다.[* 영파의 난의 선례 때문에 명나라에 조선 이상의 저자세로 나가도 조공 무역이 허가될 확률이 낮은 판국에, 그는 오히려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 외교를 파탄내 놓고, 진심으로 무역을 허가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음을 보면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리판단력이 노쇠함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버렸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속았다고 생각한 히데요시는 조선이 왕자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명분으로 재침략을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0700.html|#]] 이렇게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은 후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격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명나라 사절이 철군 문제를 거론하자 불쾌감을 드러내며 '''"[[천조]]가 사신을 보내어 자신을 책봉하니 내가 우선 참겠으나 조선과는 결코 화친할 수 없고 전쟁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에 명나라 사절들은 자리를 파했고, 며칠 후 히데요시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전쟁을 재개한다.[* 임진왜란과 강화교섭-쓰시마번과 고니시 유키나가를 중심으로, 임진왜란기의 강화교섭과 加藤淸正, 임진왜란기 일ㆍ명 강화교섭의 파탄에 관한 一考察 사명당(松雲大師)ㆍ加藤淸正 간의 회담을 중심으로] >1.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나라에 전하지 않았음 >2.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음 >3. 조선이 명나라와 일본을 이간질하였음 한마디로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자기만 일방적으로 철군을 하면 손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명나라의 강화 책임자였던 [[심유경]]은 강화 실패의 책임과 감히 황제를 속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